환웅(桓雄)과 솔로몬의 선악 판단력
- 구약과 단군사화의 계시공식 말씀 비교 -
방석종(方 錫 淙)
단군사화 고기(古記)는 환웅의 하느님 통치를 5부 체제 “주곡주명주병주형주선악”을 맡아서 관장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 다르게 ‘군사’(軍事)를 관장하는 것이 빠져 있고, 그 대신 형벌과 선악을 주관(主刑主善惡)하는 것이 있다. 이와 같은 것이 구약성경 열왕기상 3:5-13 중 9절에서 솔로몬이 기브온 성소에서 꿈으로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해달라”는 소원이 나온다. 그리고 왕상 3:11에 ”자기의 적(敵)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는 환웅이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과 함께 백성의 형벌도 선악을 판단해서 다스리는 ‘하느님(환인) 통치’와 맞먹는다 하겠다. 따라서 환웅은 백성을 먹이고(主穀), 생명을 존중하며(主命), 질병을 고쳐주는 것(主病)으로 하느님통치를 수행한다. 왕 자신을 위한 장수(長壽), 부(富), 전쟁(戰爭)을 구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왕상 3:11 참조). 이런 왕 통치소명(統治召命)은 기원전 10세기 경 이스라엘 왕 솔로몬에게서도 볼 수 있다. 신시(神市)에서 환웅천왕이 환인(桓因)의 뜻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며 가르치는 일에 ‘군사관장’(軍事管掌)이 빠지고, 형벌과 선악의 판단만 행하는 것은 ‘환국’(桓國)을 임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A. 토인비가 그의 ‘역사 연구’에서 해석한 솔로몬이 송사를 듣고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단군사화/신화를 연구하는 이들 중에 “무슨 나라가 군사(軍士)가 없느냐?”고 의아해 하는 것을 보았다. 단군신화는 세속국가보다 제정일치(祭政一致)인 환인의 나라 환국(桓國)과 환웅의 소명을 말하기 때문이다(마26:52-54 비교 참조). 문헌적으로 고기(古記)는 “석유환인(昔有桓因) 곧 환인께서 옛날에 계서... 부지자의(父知子意)아버지 환인께서 아들의 뜻을 아시고... 견왕리지(遣往理之) 거기로 가서 다스리게 하셨으니...”는 좀 생소하지만 “하느님 환인께서 아들 환웅이 삼위태백(三危太伯)의 신시(神市)로 가서 다스리게 하셨다”는 몇 행(行)의 연결된 문장들은 전권부여를 나타내며, 특히 ‘석유환인’은 인간 위에 계신 하느님이 계셔 무엇을 ‘말씀하심과 행하심’을 뜻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원시 유일신 하느님의 말씀인 ‘계시’(啓示)에 해당 되겠다. 계시 용어는 역사 종교 문학에서는 ‘계시 서두 공식’으로 고정된 문구(文句)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야웨(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는 단군사화 서두에 ‘석유환인’(옛날에 환인이 계셔)과 평행되며, 환인께서 환웅을 신시로 보내 다스리게 하셨다와 연결된 단군사화 서두 계시 공식적인 기능과 부합된 다고 하겠다(예. 예레미아 13 -16장 비교). 하나님 계시 말씀은 전쟁위기 상황에서 예언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중(市中) 백성들도 듣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한족(韓族)역사문학에서 ‘하느님’(환인)이 불러지고 그의 아들 환웅에게 소명과 전권을 부여하여 명령하는 말씀은 아주 드물지만, 단군사화 벽두에 ‘석유환인’은 계시적인 표현 문구로 충분하다고 보겠다. 그러나 현재까지 우리 대한민국의 문학인이나 종교인들은 성경을 신앙의 교리로는 보나, 세계 보편적인 인류를 위한 히브리 문학으로 비교 분석 비평하는 데는 익숙하지 못한 실정임을 고백해야 하겠다. 역사적으로 서구문필가들은 구약/신약의 내용을 모티브로 얼마나 많은 명작들을 내놓고 있는가? 예를 들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마치 예수와 마리아의 십자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같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구약 욥기의 내용을, 17세기 존 밀턴은 창세기 아담과 이브 얘기를 복락원과 실낙원으로 작품화 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럼에도 성서는 아직까지 율법적인 종교 아니면, 일반 인문학으로 보면서 ‘신학적 사상’적인 이해가 낯설고, 이방시(異邦視)되고 있어 정신세계가 풍요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창조의 생동력이 달려서 아직도 서구문화와 생산품을 모방하고 베껴대기에 여념이 없다. 지금까지 어떤 누가 단군사화 벽두에 ‘석유환인’을 원시 유일신 하느님의 계시로 구약성경의 ‘야웨께서 말씀 하시되 너는 이렇게 행하라’는 계시 공식에 비교했는가? 단군사화는 중국이나 일본 역사에서 구하기 어려운 고조선의 종교요, 어느 면 역사를 신학화(神學化)한 중국과 만주족의 침공과 격란기를 이겨낸 한족(韓族)의 ‘온유함’과 ‘인간존중’을 선포하는 성서와 같은 ‘격란기의 보물’이다. 일반 역사학자나 인문학자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생소한 ‘신학(神學)에 가까운 성전’(聖典)에 해당한다. 전쟁과 침략 민족 앞에서는 무참하게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십자가 고난 자체로 하느님조차 우리와 함께 죽으셔야 하는 고난의 역사가 기원전에 주(周)나라와 한(漢)나라 그리고 10세기 후기부터는 거란, 여진 만주족에게 쉴 새 없이 당하는 역사가 ‘단군사화’속에 녹아 있다.
중국 중화인민공화국(1912-1949)은 거란족의 요나라(916-1125년) 이후 여진 족 금(金 1115-1234년), 몽골 족 원 나라(1271-1368 년), 한족(漢族) 명(明 1368-1644년), 만주 족 청(淸 1636-1912년), 명나라를 제외하고 이민족 거란, 여진과 만주족에게 근 1000년(996년) 동안 지배를 받았다. 대한민국은 고려(918-1392년)와 조선(1392-1910년) 왕조의 992년 통치기간에 해당된다. 위를 살펴보면 한족(韓族)은 기원 10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거란 족, 여진과 만주족에게 침략을 받으며, 역사적인 고난의 시대를 겪어야 했다. 10세기 초 요나라 ‘거란’은 매우 난폭한 침략자로 ‘칼’(키타이)을 뜻한다. 거란은 고려 영토 30배였으며, 북쪽 평양과 함경도 북부 일부를 점령하였으며, 국민전체가 군사집단으로 한 사람이 3필의 말을 끌고 다니며 갈아타면서 훈련 없이도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고 한다. 주변 국가를 침공하는 방법은 수도(首都)치기이며, 보급 없이 현지 약탈로 배를 채웠다. 거대한 동북만주의 한족(韓族)이 세운 발해(渤海)가 거란족에 의해 멸망했다. 거란은 고려와 외교가 험악했으며, 고려인에게는 짐승으로 여겨졌다. 거란은 중국한자와 차별한 표의문자(表意文字)를 이중으로 만들어 쓰다가 13세기에 아랍문자를 차용한 몽골의 표음문자(表音文字) 체제로 바꾸고 만주문자로도 전해졌다. 그럼에도 폭력을 쓴 거란은 몽골에 흡수되었고, 여진과 만주족도 흩어지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단군 고조선은 처음 1000 년 기간은 한족(漢族)에게, 나중 1000년은 거란, 여진, 몽골과 만주족에게 수없이 침략을 겪으며 2000년의 격란기(激亂期)를 사는 동안 ‘온유한’ 민족으로 초탈∙ 환인(桓因) 나라와 변모∙웅녀(熊女)로 나타나며, 원시 유일신 사상과 환웅의 제정일치 하느님통치의 문명을 창조하였다. 이것이 바로 격란기 보물 성전적(聖典的)인 ‘단군신화/사화’이다. 20세기 이후 21세기가 와도 세계유일의 분단국가 한반도의 대한민국과 조선인민 공화국을 보자 ! 한 민족으로 통일을 약속하면서도 한 골육의 형제를 대항하는 공격적인 위협은 온유한 환인의 나라 웅녀족과는 멀고 낯설기만 하다. 중국과 북한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다. 북한은 마치 거란과 같이 국민전체가 군사집단이요, 전쟁시 보급 없이 현지약탈을 하고, 최근에는 첨단무기로 수도공략을 위협하는 것이 한족(韓族)답지 않다. 중국역시 한반도 통일의 경계를 백두산 보다는 평양과 원산 라인을 긋는 듯하다. 역사적으로 중화 한족(漢族) 명(明)나라와 조선 사이의 영토경계와 현 남북한 경계가 무효화 된다면, 동북아 평화는 요원하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평화의 기술을 포기하고 전쟁기술로 쓰인다면, 이는 단군사화의 하느님 통치의 ‘홍익인간’사상과는 대치(對峙)된다. 기원후 10세기 이후 출몰했던 요나라 거란족, 금나라 여진족, 청나라 만주족이 흩어져 사라지거나 내부 분열로 자체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류는 죄의 형벌을 의식하며, 선악을 판단하는 지혜로 자기 원수와 적의 생명을 멸하기를 구하지 않고, 군사적인 힘을 능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단군사화의 환웅이 신시(神市)에서 환인의 소명을 받아 선악(善惡)을 주관하는 하나님 통치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결코 단군사화의 하나님 통치는 국정 수행자(修行者)의 통치수단이 아니며, 모진역사 속에서 온유한 성격으로 초탈한 하나님 백성의 삶 속에 나타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마 5:5 참조). 하나님의 임재 아래 가축과 맹수들 어린양과 함께한 이리, 염소와 함께한 표범, 송아지와 살진 짐승과 함께한 어린 사자를 끌고 가는 ‘어린 아이’가 누군가(사11:6,13; 12:1-2 참조)? 전투적-공격적인 민족과 함께한 변모된 온유한 웅녀족(熊女族)이 아닌가?
이스라엘의 북 왕국 에프라임이 남 왕국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가 에프라임을 괴롭게 하지 않는 것처럼 이제부터 북한과 남한이 서로 질투하가나 괴롭게 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으나 이제는 그의 진노가 돌아섰고 우리를 안위하시게 하는 공존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구원의 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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